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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사건] 대구 미국문화원 폭발사건: 1983년 충격의 테러와 36년 만의 무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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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미국문화원 폭발사건: 1983년 충격의 테러와 36년 만의 무죄

대구 미국문화원 폭발사건. 사진=유튜브채널 KTV교양
대구 미국문화원 폭발사건. 사진=유튜브채널 KTV교양


1. 사건 개요와 당시 상황

1983년 9월 22일 오후 9시 33분, 대구 중구 삼덕동 미국 문화원에서 폭탄이 폭발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미국 문화원 건물이 크게 파손되고, 사망 1명과 부상 4명의 인명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이미 1980년 광주, 1982년 부산 미국문화원 사건이 있었던 터라 사회적 충격은 더욱 컸습니다.


2. 희생자 허병철 군의 안타까운 죽음

사건 당일, 영남고등학교 1학년이던 허병철 군(16)은 문화원 앞에 놓인 수상한 가방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의심을 품고 경찰서로 가져가 순경과 함께 현장을 확인했지만, 가방을 들어 올리는 순간 폭발이 일어나 현장에서 즉사했습니다. 그의 용기 있는 행동은 많은 이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습니다.


3. 폭발 피해와 대구 시내 충격

폭발 위력은 엄청났습니다. 미국 문화원의 외벽이 무너졌고, 맞은편 경북대 부속 병원은 물론 인근 500여 개 건물의 유리창이 산산조각 났습니다. 지나던 차량 2대가 파손되며 운전자들도 부상을 입었습니다. 대구 시민들에게는 전쟁 같은 공포가 찾아왔습니다.


4. 경북대 학생 5명의 체포와 고문

경찰과 안기부는 근거 없는 추측으로 경북대 학생 5명을 체포했습니다. 그들은 아무 증거도 없이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허위 자백을 강요당했습니다. 결국 이들은 “내가 폭파했다”는 거짓 자백을 했고, 억울하게 실형을 살았습니다.


5. 북한 소행으로 밝혀진 진범

사건 발생 3개월 뒤, 부산 다대포 해안에서 북한 간첩들이 검거되며 사건의 진상이 드러났습니다. 폭발물과 건전지가 북한제였고, 진범은 북한 노동당 연락부 소속 공작원 이철이었습니다. 그는 북한으로 돌아가 훈장까지 받았습니다.


6. 재심과 36년 만의 무죄 판결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의 권고를 계기로 재심이 청구됐고, 2019년 대구지법은 학생들에게 전원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법원은 “고문에 의한 자백은 증거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억울한 누명을 벗기까지 무려 36년이 걸렸습니다.


7. 피해자들의 상처와 국가 배상 문제

하지만 고통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학생 중 한 명은 무죄 선고를 듣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남은 이들은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충분한 보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18억 원을 청구했지만 6,300만 원만 인정되는 등 정의 실현은 여전히 미흡했습니다.


8. 오늘날의 교훈: 인권과 진실의 가치

대구 미국문화원 폭발사건은 단순한 테러 사건을 넘어, 억울한 희생자와 인권 침해의 상징으로 남았습니다. 이번 사건은 “국가권력이 인권을 짓밟을 때 얼마나 큰 상처가 남는지”를 보여주며, 오늘날 우리에게 진실과 인권의 가치를 다시 일깨워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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